명성황후, 일본의 거액뇌물 거절

[조선일보 김기철 기자]

명성황후가 1895년 일본으로부터 대여금(차관) 명목으로 거액의 ‘뇌물’을 제의받았으나 단호하게 거절한 직후 시해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인 정수웅 PD는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입수한 이노우에 문서 속의 미우라 주한(駐韓)공사-박영효 대화록을 5일 공개했다. 이 대화록 속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작전명인 ‘여우 사냥’이 박영효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추정케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노무라(野村靖) 당시 일본 내상이 1895년 8월 2일자로 이노우에(井上馨) 공사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한국 부임을 앞둔 미우라 공사는 당시 명성황후 암살 사건에 개입돼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를 이날 만나 대화를 나눴다. 노무라 내상은 “(박영효가) 일찍이 조선에서 이노우에 공사와 비밀 상담을 가졌는데 조선 정부에 줄 대여금 300만엔 중 약간은 민비에게 배포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어느 날 그것을 왕비에게 이야기했더니, 왕비는 손을 뿌리치며 ‘받지 않겠다. 두렵다. 두렵다’며 거절했다”고 썼다. 박영효는 또 미우라에게 “민비는 ‘한국의 큰 여우’로 만사의 장애가 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마쓰(小松裕) 구마모토대 교수는 “(왕비를) 돈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면, 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1895년 4월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얻은 요동반도 등의 이권을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등의 ‘3국 간섭’으로 중국에 되돌려주는 등 수세에 몰렸다. 당시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연계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인아거일’(引俄拒日)책을 썼기 때문에 일본은 불안에 떨었고, 결국 명성황후 제거에 나서게 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는 요시카와 사법상과 이노우에 공사의 면담 직후인 1895년 7월 이노우에의 추천으로 후임 주한공사에 임명됐다. 이노우에는 미우라가 그해 9월 1일 부임한 이후 17일간 공사관에서 함께 머물다가 시해사건 발생 20일 전 귀국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일본은 러·일 전쟁을 일으키고 한일 의정서를 체결할 때도 조선 왕실에 돈을 안기려고 했으나 왕실에서 받지 않았다”면서 “명성황후가 자금 제의를 거절한 것은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꿰뚫은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박영효는 명성황후가 조선 개혁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우’라고 불렀고, 시해 사건에도 관련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입이 사건 110년 후에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국내 학자들은 “일본이 자료 공개를 감추거나 학자들이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유영익 교수는 “명성황후 시해는 일왕에게도 보고가 됐을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자료는 궁내부에 있을 것 같지만, 일본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이노우에 문서나 무쓰 문서도 한자와 일본어를 흘려쓴 필사본이기 때문에 한문에 능한 전문가가 아니면 판독하기도 쉽지 않다. 학계에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선 일본 국회도서관 등 주요 문서 소장처에 대한 장기적이고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수웅 PD의 ‘110년 만의 추적-명성황후 시해사건’ 다큐멘터리는 시해 110년을 맞는 8일과 9일 밤 11시 KBS 1TV를 통해 방송된다.

(김기철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kichu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