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인의 요점정리>

독도 관련 작년 봄에 어느 일본 거주 한국분이 올리신 글(#7434)에 일본내 한 단체가 낸 성명서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일본인이 정리, 주장하는 독도문제를 읽다보면 이런 일본인도 있다는 생각 이외에 나름대로 정부차원에서 하는 대처는 적절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

이번에는 조용조용하게 넘어 가지 않겠다고 정부가 공언을 했다니 정말 얼마나 단호히 대처하고 넘어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내용이 이러한데 이런 사안을 가지고 무신 국제사법재판소 찾아 갈 일이 있는가?

(1) 역사적으로 조선 땅인 독도

에도 막부는 독도를 ‘마쯔시마’로 부르고 ‘다케시마’로 불린 울릉도와 함께 두 섬을 일본인의 도항과 거주가 금지된 조선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막부는 그 관선지도에 독도를 기재하지 않았다.

메이지 정부도 1905년 편입까지 독도를 조선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869년 조사를 위해 조선에 파견된 외무성 관료는 그 다음 해 제출한 보고서 ‘조선국교제시말탐서(朝鮮國交際始末探書)’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부속이라
고 썼다.

1877년 당시의 최고 국가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동해 내 울릉도와 기타 한 섬을 판도 외로 정한다’는 지령을 발했다. 두 섬은 판도 외, 즉 일본 영토가 아니다는 공식 선언이다.

1894년 메이지 정부가 국가사업으로 제작한 지도가 ‘대일본관할분지도(大日本管轄分地圖)’로 발간되었는데 두 섬은 기재되지 않았다. 일본 해군은 ‘조선수로지(水路誌)’1894년판과 1899년판에 두 섬을 기재했다. 이것은 독도가 조선 영토로 인식하고 있던 것을 나타낸다.

1900년 대한제국은 칙령41호에서 울릉도 주변에 있는 ‘석도(독도)’가 자국 통치하에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메이지 정부는 이견은 내지 않았다.

(2)조선 식민지배 시작과 연결된 독도 약탈

그런데 1905년 메이지 정부는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 군사 시설 건설을 목적으로 함과 동시에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격렬하게 추진하는 상황 속에서 독도를 약탈한 것이다.

‘미국은 필리핀을,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조선을 잡겠다’는 미영일간의 제국주의적 합의를 배경으로 하여 1904년 2월 일본군은 러일전쟁에 돌입함과 동시에 인천에 상륙하고 한성을 제압했다.

이 달 한일의정서 주인을 강요, 5월 대한(對韓)시설강령 각의 결정, 9월 제1차한일협약을 맺었다. 러시아 해군이 일본 수송선을 가라앉히는상황 속에 11월 러시아에서 ‘리 앙코르도’로 불리던 독도에 러시아 해군 감시용 망루 건설이 가능하다고 예비 조사로 확인했다.

다음해인 1905년 1월 메이지 정부가‘리 앙코르도’를 ‘무주지(無主地)’로 단정하여 영토 편입을 각의 결정해서 ‘다케시마’로 명명했다. 그 때 관계국인 조선과의 협의도 관보를 통한 공시도 없었다. 그 해 7월 독도에 망루를 착공하고 8월부터 감시 활동을 시작했다.

곧 러일전쟁을 이기기 위한 군사 시설 건설을 목적으로 해서 독도의 영토 편입을 비밀리에 강행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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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시임을 이유로 하여 다른 나라 영토인 것을 인식하면서도 영토 편입을 한, 바로 제국주의적인 영토 획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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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은 1905년 10월 ‘을사보호조약’ 강제로 인한 조선 식민지배 시작과 하나로 벌어진 것이었다.

(3)민족배타주의에 맞서야..

‘독도의 날’ 제정은 일본 우익 세력이 추진하는 군국주의 부할 그것이다. 유사법제, 헌법 개악, 유엔상임이사국 진출, 미일 군사동맹 강화, 역사왜곡교과서 문제 등 일본 정부와 민간 우익 세력이 하나가 되어 추진하는 전쟁 책동의 일환으로 민족배타주의의 화살을 북한,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돌리기 시작한 조짐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