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만주족과 대화할 수 있냐고?>

고구려연구회 홈피에서 한때 열띤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 댓글 대화 내용중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 네티즌이 묻기를 – 금·청사의 한국사 편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대해 어느 다른 네티즌이 되묻기를–대답은 ? 아니다 일것이다.

이에 대한 답글이 -고 했다고 한다 -약 236개 어휘가 비슷하고 모음조화.두음법칙 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이런 우문현답 같은 말들이 요즈음 나오나?바로 고구려사 왜곡으로 부쩍 고구려사,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금과 청이 계승한 여진에 대한 연구가 없이 달랑 고구려사, 발해사만이 우리 역사다 하는 것이 가능한가?그런데 지금 창과 방패의 논리적 모순에 발목잡혀 있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해 고구려 연구회의 서길수 교수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국의 정사인 25사에 들어간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대주의적 전통사관”이다. =>요·금·원·청을 다 중국사로 인정한다면 이제 고구려의 중국사 편입도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 말이 충격적(?)이다.

왜그런가? 바로 아래와 같은 기록 때문이다.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로 삼나이다.”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은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을 썼다고 한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분했는지 꿈에 금태조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지람을 했다는 것이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 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다.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물론 이 글은 역사소설인데 그러나 근거 없는 소설가의 소설이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는 역사가의 소설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발해역사의 귀속 문제를 논하면서 과연 그들을 구성했던 말갈이나 여진을 제쳐놓고 논할 수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이런 헤드라인의 기사가 있는 모양이다 – 이걸 두고 사학계가 뫼비우스의 띠속에 같혀 있다고 하는 모양인데.. 고구려, 발해역사를 논하기는 매우 어려운 구석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