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남아 있는 한가지 방안>

94년 당시 클린턴의 정책을 공공연하게 비판해왔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6월초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이 분쟁 조절을 위해 자신을 평양에서 초청했다고 말했다.

이때 미 행정부 관리들의 반응은 막연한 희망에서부터 공포에 찬 경악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6월 5일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는 카터를 달래려고 애틀랜타로 날아가 당시 상황을 브리핑했으며 이는 카터의 방북 의지를 더 굳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클린턴은 선택의 여지가 점점 좁아져 감에 따라, 그리고 앨고어 부통령,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 갈루치 등의 부분적인 지원에 따라, 카터가 정부 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다는 조건을 명백히 한 뒤 그의 방북을 허락했다. 이에 카터는 6월 13일 서울을 거쳐 15일 평양에 들어갔다.

카터는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으로부터 “IAEA 사찰단이 곧 축출될 것이며, 3단계 고위급 회담이 재개돼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는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북한 측은 처음부터 카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이란 그의 지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터는 1976년 대선 유세 때 주한 미군 철수를 약속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북한은 카터를 이용했던 것이다.

한편 카터는 북한 측의 강경자세에 실망하고 놀란 나머지 다음날 새벽3시 보좌관 마리온 크릭모어(Marion V. Creekmore 전직 대사)를 판문점으로 보내 워싱턴에서 연락이 오면 회담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클린턴에게 전하도록 대비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식은 미국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날 아침 김일성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날(16일)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동결’시키라는 카터의 요구에 김일성은 잠정적으로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겠으며, 미국이 경수로 공급을 약속하면 항구적인 동결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내용이 카터와 동행한 CNN취재팀을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됐다.

물론 이와 같은 김일성의 제의는 워싱턴 관리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사실 같은 시간 미 행정부는 한국에 1만 명의 추가 병력을 투입하는 문제를 보고하고 있었다. 워싱턴 시간으로 16일 오전 10시 30분경, 안보회의가 열리고 있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카터를 무시하고 제재 조치를 계속 밀고 나가자고 제의했다. 이에 NSC 보좌관 스탠리 로스(Stanley Roth*현 미보잉사 아시아 담당 부회장)는 국제적 차원이 아니라 미국 차원에서 북한의 핵동결을 수용하고, 이번기회에 펜타곤이 주장해온 북한의 과거 핵개발 규명 조건을 벗어버리자고 제안했다.

한편 클린턴은 김일성의 요구를 받아들여 “오늘의 진전이 북한이 진정으로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고위급 회담 재개에 동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2차 한국전의 위기는 이렇게 해서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