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난히 신라가 부각될까?>

아무리 혈연관계가 있더라도 같은 언어를 사용치 않으면 이질감을 갖게 된다. 삼국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는 언어권에 속했다. 하지만 우리 고유의 언어는 한문 구조와 사뭇 다르다.

하나의 손쉬운 보기를 들면 어순부터 달랐다. “나는 경주에서 왔다”고 표현할 적에 한문 어순은 ‘아래 경주’(我來慶州)로 표기한다. 곧 목적어와 보어가 한문은 도치되어 있으나 우리말은 목적어나 보어를 중간에 두는 것이다. 한문은 영어투와 같다. 하지만 몽골어·만주어·일본어는 우리 어순과 같다.

그러니 우리말을 한자 또는 한문 투로 쓸 적에 여간 장애가 놓여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먼저 이두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두는 한자를 빌려 우리 음과 문장을 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유명사로 우리 음인 땅 이름, 사람 이름, 벼슬 이름 또는 우리말의 어순에 따라 의사를 표기하는 방식이다.

고구려에서 처음 사용한 이두는 백제·신라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조선으로 이어져왔다. 뜻글자인 한문을 소리글자로 바꾼 것이다. 이두는 공문서와 가사 또는 편지에서 사용되어 우리말의 고유성을 살렸던 것이다.

그러면 삼국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초기 신라는 후진 곳에 도읍을 정하고서 중국의 나라들과 교류를 거의 트지 않았다.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할 무렵, 신라는 백제에 중국 남쪽 나라들과 교류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때 신라와 백제의 사절일행이 중국 남쪽으로 들어갔다. 이때 백제의 사절이 중간에서 신라말을 통역해 의사를 전달하였다.

신라와 백제 사람들은 의사를 소통할 적에 통역이 필요치 않았으나 중국 사람들을 상대할 때에는 달랐던 것이다. 그러니 세 나라 사람들은 통역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같은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지역에 따라 방언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세 나라는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방언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온돌·주름치마등 中과 다른 문화 공유

다음 풍습(문화)을 알아보자. 풍습의 유사성은 여러 분야에서 확인된다. 사상과 신앙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공통으로 유불선을 추구한 것 말고도 건축 미술 등의 분야에서 중국과 아주 다른 경향들이 많다. 풍습에서는 더욱 차이가 많다. 보기를 몇 가지만 들어보자.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여자들이 주름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중국 여자들은 주름치마를 입지 않는다. 주름치마는 몽골과 한민족이 입었다.

온돌은 고구려에서 전래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침상(寢牀)에서 잠을 자지만 한민족은 온돌에서 잠을 잔다. 백제와 신라 사람들도 침상을 거의 사용치 않았고 오늘날에도 주거생활에서 한민족이 온돌방을 유지하고 있다. 음식에서도 한민족은 밥이 주식이었고 조리법도 시루와 솥을 이용한다. 중국 사람들은 빵을 주식으로 하고 조리법도 주로 프라이팬을 이용한다.

그밖에 씨름, 윷놀이와 주택, 무덤 등에서 삼국이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 양식이 고려·조선으로 이어져 왔다. 중국과 사뭇 다른 양식이었던 것이다. 위의 몇 가지를 통해서도 삼국은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만주의 150만 조선족은 고구려 아닌 신라후예?-

지금 중국의 동삼성(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부르는 한민족이 약 1백50만명 살고 있다. 그 유래는 아주 길고 복잡하다. 1860년대부터 연길지방으로 집단 이주를 시작한 뒤 해마다 늘어났다.

그런데 근래 ‘동북공정’이 추진된 뒤 새로운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족 특히 삼남지방 출신들을 “고구려 후예”라 하지 않고 “신라의 후예”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멋모르는 조선족들도 이에 따라 “신라의 후예”라고 서슴없이 대답한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조선족과는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자, 조선족은 고구려의 후예인가, 신라의 후예인가? 교묘한 분리정책이 아닌가?

〈이이화/ 역사학자〉 [한국사 바로보기] 23. 고구려·백제·신라는 한 민족인가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4-10-27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