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우리 史書 20만권 불태워 (펌)

총독부 우리 史書 20만권 불태워

일제는 한국 상고사의 말살을 한국의 강제 병탄이전부터 강력히 추진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강탈한 후 이해 10월 1일 관보를 발행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보인다. 이 관보는 조선을 영원히 탈취할 것으로 착각한 그들이 만든 것이므로 이제는 오히려 일제의 조선 침탈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이나 아쉽게도 번역이나 집중적인 연구가 되지 않은 실정이다.

1910년, 이른바 그들이 주장하는 ‘일·한합방’이 되자 초대 총독은 취임하자마자 조선의 관습과 제반 제도 조사를 명령했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식민지를 제압하기 위해 설치한 가장 악질적인 기관의 하나로 초기에는 법령의 제정과 형벌을 관장했다. 일제의 무단정치를 악질적으로 수행한 관서였다.

조선의 관습과 제도조사라는 미명을 내세운 취조국은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제 압수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방에서는 서사(서점), 향교, 서원, 구가, 양반가, 세도가를 뒤졌다. 다음 해 12월 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권이라고 광복 후 출간된 와 가 밝히고 있다.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관계 조선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 열전류 및 심지어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장지연의 ‘대한시지지(大韓新地誌), 이채병의 ‘애국정신’, 신채호의 ‘을지문덕’ 등이 집중적인 수난을 받았다. 이는 일제가 조선사를 말살하려고 한 공개된 첫 만행이었다. 총독부 취조국은 필요한 일부 서적, 즉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만한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분서하였다.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寺內正穀는 총독부 취조국이 관장하던 관습·제도 조사업무를 1915년 허울뿐이던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다. 일본인들이 이나라 사서를 인멸했을 뿐 아니라 직접 손을 대어 왜곡 편찬을 노골화한 것이다.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附日)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힌 중추원은 1916년 1월 유정수 등 중추원 참의와 경도제국대학의 三浦周行 교수와 경도제대 今西龍 강사 등 3인에게 지도·감독을 의뢰했다.

새로운 조선반도사를 만들려는 일제는 전국에서 압수·분서한 이외, 그들이 조선사 왜곡을 위해 근거 자료로 일부 사서를 남겨두고 총독부 취조국에서 중추원 편찬과로 편사업무를 이전하기 앞서 이들 자료의 철저한 분석과 왜곡 편사 계획을 수립했음이 분명하다. 조선반도사 편찬을 맡은 어용학자들에게 내린 편사지침이 이를 증명한다.

①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② 전편을 상고삼한, 삼국, 통일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 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7쪽, 47쪽)

조선총독부는 이 같은 편사 원칙을 세우고 ‘공명 적확’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면 사료가 필요하다는 명목을 붙혀 이번에는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다시 감행한다. 겉으로는 중추원이 사료 수집을 맡아 대여 방식 등의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각 도청, 군청, 경찰서 등이 위압적인 방법으로 수색했다. 이 나라 역사와 전통, 문화, 예술, 인물 등 제2차 수색에서는 압수 범위도 오히려 늘어났다. 즉,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까지도 압수되었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어쩔수 없이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은 조선사람들을 半일본 사람으로 만드는 이른바 교육시책의 하나로서 1922년 12월 훈련 제64조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