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1년, 새 시대의 신호탄이 되다

시청앞에서, 청계천에서, 처음 촛불이 켜진 것이 1년이 지났군요. 그 촛불은 우리 사회가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또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초 촛불들이 거리에 나온 것은 ‘먹거리에 대한 불신’에서 촉발됐겠지만,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그것은 정치권력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 정치 권력이 가졌던 최악의 결함이었던 국민과의 ‘소통 부재’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제적으로는 세계를 지배해 온 경제 담론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자본의 극단적인 세계 시스템에의 간섭은 결국 관세라는 가장 기본적인 바리케이드들을 치워버리라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1세계 중심의 폭력적 논리로 관철됐고, 이명박씨는 당시 미국 방문을 통해 자신이 그 자본 논리 앞에서 가장 앞장선 마름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않았지요. 이 때문에 국민들이 분노했고, 촛불을 들게 됐습니다. 그 후로 일년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이미 자본이 ‘국가’라는 시스템을 넘어서려 했음을 봤고, 그 와중에서 강성한 자본의 힘을 누르고자 하는 반작용으로서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라는 사건을 보기도 했지요. 촛불은 분명 희망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건강과 미래를 위협하면서까지 ‘이윤’이라는 논리를 관철시키려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촛불은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으로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1인 1표의, 그 크기가 동등한 자기의 주장과 의사의 표출방법이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대의민주주의, 형식민주주의의 한계가 무엇인지도 명확히 봤습니다. 이명박씨가 분명히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대통령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평화적으로 정권을 잡더라도 그 정권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국가의 파멸적 위기를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그 예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히틀러의 등장과 나찌즘의 발호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촛불은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밝은 빛을 발했고, 저는 여기서 간접민주주의의 종말과 이를 넘어서는 직접민주주의의 도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인터넷’이라는 도구로 ‘개인과 개인’이 연결돼 있었으며, 그들이 시위에 나서는 과정들도 인터넷과 셀폰 등 기타 현대 의사소통 도구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며, 저는 현대사회에서는 과거와 다른 직접민주주의적인 소통과 정치 행태가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맥락을 그들 역시 읽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들은 역사의 퇴행과 안주라는, 혹은 정권의 유지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아고라와 방송에 대한 탄압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볼 수 있듯, 과거는 명확하게 회귀했고, 대한민국의 극우세력과 그 소수의 지지세력은 그대로 소수의 이익을 위한 다수의 지배정책, 즉 파시즘의 부활을 그대로 내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의 역사 발전 과제는 다시 지배의 소수와 피지배의 다수가 맞서는 파시즘의 발호를 막는 것으로 퇴행해 버렸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입이 있고, 눈이 있고, 귀가 있는 한 촛불의 대의는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직간접적인 민주주의의 시대의 개막을 그대로 보여준 촛불들의 힘의 과시이며, 나아가서 자본의 무한방임과 세계 경제의 방향성 설정에 영향을 끼치는 힘으로서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촛불은 그저 우리나라만 비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의 역사를 비추는 힘인 것입니다. 비록 그 힘은 아직 지배자들의 탄압을 완전히 뒤집을만큼 강력한 것이 아닐지언정, 촛불의 역사성과 그 안에서의 자리매김은 분명 새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