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은 힘이 아닌 간첩과 부패로 패망

월남은 힘이 아닌 간첩과 부패로 패망

월남, 야당총재*대통령비서실장까지 간첩

자유월남 멸망의 이유는 공산월맹의 국력이 아닌 월남의 부패 그리고 간첩들이었다. 월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맹을 훨씬 앞질렀지만 부패했고, 간첩들은 부패척결과 반전평화를 명분으로 월남의 신경망을 장악해갔다.

국가신경망이 간첩들에 장악된 상태에서 세계4위의 화력을 자랑하던 월남은 군화조차 신지 않고 남진하는 월맹군에 1975년 4월30일 적화(赤化)돼 버렸다. 같은 해 1월3일 월맹군이 남진을 시작한 지 채 네 달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월남이 간첩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월남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하는 5만여 명의 월맹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월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1967년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며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반전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부패척결운동과 반전평화운동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월남인들이 값싸게 버린 조국월남 공산화의 결과는 참혹했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모든 군인*경찰*공무원*지도층인사*언론인*정치인들은‘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고 이 중 다수는 생사불명의 상태가 됐다.

하층의 월남국민들은 소형선박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주월 마지막 공사로서 월남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 동안 억류됐다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이대용 공사는“월남은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며…..

“월남은 부정부패에 망하고, 속임수에 망하고, 극성맞은 데모에 망하고, 간첩들에 망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