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속국이라는 증거

백제는 신라와 당군의 연합군에 의해 서기 660년에 멸망하여 백제에 대한 역사

자료는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흔치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에 어느정도의 역사가 남아있다.

중국측의 사서를 보면 백제의 요서 산동 장강하구 왜에 대한 진출에 대한

기술이 나온다.

현재 우리 역사교과서에서는 중국의 사료밖에 남아 있지 않아 그들의 표현대로

점령하여 통치한 것이 아닌 진출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기원후

4세기-6세기경 백제가 활발한 해상 활동을 통해 이곳을 정치 군사적으로 점령

하여 통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중국의 편년체 사서의 귀감으로 불리는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당이 고구려를 치려하였으나 요서를 백제가 점령하고 있어 치지 못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백제의 국제적인 흔적은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멀리 중국 남부에 까지 남아

있다. 중국 남부 광동성에는 백제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고 이 곳에서 사는 사람

들은 스스로를 한국의 백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며 실제 현재의 한국어와 유사한

단어가 그들의 말 속에 있다.

또한 백제가 660년에 망하고 부흥운동을 할적에 유명했던 흑치상지라는 백제의

장군이 있다. 흑치는 검을 흑에 이 치자인데 이는 그가 한반도 출신이 아닌

남방출신임을 말해주는 증거로 보고 있다.

백제가 망하자 663년 왜에서는 3만명의 원군을 백제로 보냈다가 백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괴멸당하는 사건 있었다. 당시 왜왕은 의자왕의 여동생이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 백제와 왜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확인 할 수 있으며

5000의 결사대로도 5만의 나당연합군을 맞아 긴 시간 저항했던 백제군에 비해

3만이라는 대군을 거느리고도 나당연합군에 대패한 것은 그만큼 일본이 아직

삼국에 비해 군사적 수준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백제가 망하자 수많은 백제인들이 바다를 건너 왜로 이주하여 왜의 귀족층을

이루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백제가 왜의 상국이었으며 왜라는 나라자체가 백제인이

바다를 건너 세운 식민지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부동의 증거가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