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히 때가 더 살기좋았다

박정희때가 더 살기 좋았다는 것에 대해.

번호 147297 글쓴이 좋은날 조회 137 점수 75 등록일 2006년9월3일 06시03분대문추천 2 정책 0

인터넷을 보다보면 박정희때가 살기 좋았다는 말을 많이 접한다.

궁금해진다.

정말로 다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걸까.

내 나이 40대중반, 고등학교 2학년때 박정희가 죽었으니 줄곳 박정희가 대통령인때에 초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보낸셈이다.

내가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때는 초등학교 2학년, 우리반에 나혼자였다. 고학년으로 올라갔을때 즈음에는 한반에 서너명 정도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이 있었던 것 같다.

동네에서 티비가 제일 먼저 있었던 집이었다. 저녁 먹고 나면 이웃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와서 방에 가득찼고, 레스링이라도 할때면 그야말로 대단했다.

동네에서 전화를 제일 먼저 놓은 집도 우리집이었다. 이웃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우리집 전화를 친척들에게 알려놓은 모양이었다. 가끔씩 한밤중에 이웃들에게 부고전화가 와서 깨기도 했다.

중학교때까지 집에 식모언니가 있었다. 초등학교 간신히 마치고 입하나 덜려고 나온 언니들이었는데 일이년쯤 우리집에 있다가 있다가 공장으로 취직해 떠나곤 했다. 남는 것은 더 적을텐데도 또래들끼리 모여 사는게 좋고, 식모소리 듣는게 너무 싫다며 공장으로 가는 것 같았다.

중학교 2년, 무슨 수업시간인지 기억 안나지만 한해 우리 국민 쇠고기 소비량을 말씀하셨는데 우리 생각에 너무 적은 것 같아서 에-이 라고 하면서 믿지 않았다. 그 때 선생님께서 그럼 너희들 중에 오늘 아침 쇠고기 먹고 온 사람 있으면 손들어 라고 하셨다. 제분회사 사장딸 하나뿐이었다.

중3때, 진짜 공부 잘하는 애들중 몇명도 여상으로 진학했다. 빨리 졸업해서 은행에 취직해 오빠를 혹은 동생들 학업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전두환때 대학시절을 보냈다. 짜장면, 우동이 500원하고, 짬뽕이나 간짜장은 6-700원 하던때였다. 회식때 짬뽕이나 간짜장 먹는 날은 괜찮은 날이었다. 교통정리 아르바이트 하나 얻기도 만만치 않았다. 모두들 가난해서 차비랑 학교식당에서 밥 사먹을 돈 정도 집에서 받아쓰면서 다녔다.

우리가 학교 다닐때는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신학기때 했다. 신문 보는 사람, 라디오 있는 사람, 티비 있는 사람, 아버지가 초등학교까지 나온 사람, 중학교까지 나온 사람 등등 별 시시콜콜한 것을 다 캐물었다. 어디에 손을 들고 어디에 못드는가를 보면 정말 가정환경이 보인다.

그때는 정말 다들 못 살았다. 단연 잘사는 아이에 속했던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그당시 내가 살았던 것보다 훨씬 나은데 그때가 더 잘 살았고, 지금은 너무 힘들다는 푸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만학도를 받아 중학교 졸업장,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는 곳이 제법 있는데 거기 입학하려면 더러는 기다려야 한다. 거기에 다니는 사람들 중 나 또래의 사람들도 많았다. 다 잘 살았다고 하는 박정희시절때의 사람들이다. 가족들 부양하느라 오빠나 남동생 공부시키느라 자기의 공부를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이다. 아침마당에 나와서 울음바다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아직도 하는지는 모르지만)도 박정희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사회 구석구석 얼마나 많을텐데 그 사람들조차도 그 때가 살기 좋았다고 말할지도.

예전의 부모들에 비해 지금의 부모들이 벅찬 것은 안다. 그때는 아주 일부가 배우던 피아노를 어느 부모 할 것 없이 가르쳐야 하고, 그때는 딸들 돈벌어오게 하고 아들 하나 대학보내면 되었는데 지금은 모든 부모가 대학걱정까지 해야 하고.(70년대 말만 하더라도 대학진학율이 7%였단다.지금은 8-90%가 된다지.)

그렇다고 해서 그때가 더 잘살았다고, 지금이 더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그렇게 일하고 더 많이 누릴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자기 몫을 착취당했는지도 모르면서 마치 그때가 더 풍성했던 것 처럼 여기다니….세뇌란 정말 무섭다. 쌀밥을 먹게 해 주신 위대하신 어버이 김일성 수령 동지 감사합니다를 외치는 북녁동포랑 다를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