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처형대상은 5.18 테러범 뽀글이라서 걱정되시죠?

2006년 12월 20일
북한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들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 김용화씨의 발언이다.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
김일성이 1986년 1월 6일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본부에서 한 발언이다.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김정일이 1982년 3월 북한특전여단들 게릴라 훈련장에서 한 발언이다.

-5.18 광주에 갔다가 북한부대로 귀대한 북한군들의 증언-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 (탈북한 북한 장교)는 이들의 증언을 확보해 놓은 상태이다. 일부인사는 안전을 위해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A씨(익명을 원함)
“내가 참가했던 조는 시위대 쪽에 편입되어 행동했다. 반반씩 나뉘어 절반은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고 절반은 계엄군 쪽에서 활동했다…우리 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 중에 창석이(당시 중대장), 광만이(정치지도원)를 포함해 세 명만 돌아왔다…생사람 죽이는 일을 처음 해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도망가는 여자들 등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우리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남조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서 지원세력이 몰려오면 될 수 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체는 조직적인 단합이 없고 동내패거리 싸움식이었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일이 커지게 돼 있고 봉기의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다.”

B씨(익명을 원함)
“우리도 죽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총알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다. 양쪽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시위대들이 많이 죽이 않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기도 불가능했다. 괴뢰군이건 시위대건 양쪽에 피해가 생겨서 서로의 마찰이 커져야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다.”

C씨(익명을 원함)
“우리도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행동과 좀 다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우리가 갈 때는 공해상에 그쪽 애들 두 척의 뜨락선이 마중 나왔는데 사복을 입었고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 김용화
“봉기 당시에 북한 인민군 중위로 있었고 황해북도 송림에 위치한 사회안전부 연봉부대에서 자동차를 관리하며 인민군의 수송을 담당했었다. 그 당시 ‘너구리 작전’이라고 해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보총을 들고 나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밤 1, 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북한교도지도국 대위출신의 최준일
“북한특수부대출신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 그 당시 나는 완전 전투태세로 무장한 채 광주사건에 대한 24시간 긴급속보 전해 들으며 20여일간 출전명령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3분의 1이 희생되고 나머지 2는 귀대했다”

5.18 광주폭동은 그 당시 북한에 실시간 생중계되었다.
시민군은 교도소,경찰서,군부대,방송국,도청을 습격하고 점거하였고 총기를 탈취하여 진압군에 조준사격하고 장갑차와 탱크를 탈취하여 공격했다. 사망자 중 70%는 진압군이 아니라 시민군이 사용하는 총기에 맞은 총상이었다.

2006년 12월 20일 북한 특수부대 출신 탈북장교들은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하여 작전하였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광주사태에서 북한 게릴라부대는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여 시민을 사살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시민들을 광기상태로 만든 후 이들을 이끌고 방산업체,감옥을 습격하여 총기를 탈취하였다. 이 후 북한 특수부대는 광주시민과 함께 진압군을 조준사살함으로써 진압군이 발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상황을 끌고 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정권의 1980년 5.18 광주테러는 친북어용정권 집권의 기반이었고 장기적인 대남적화 로드맵의 출발점이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기관인 통일전선부 지하 자료실에 대남관련 자료들이 쭉 전시되어 있다. 그중 한곳에 광주사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북한 특수부대 상위(장교) 임천용 (김정일의 사촌형인 김선일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